들어가며
제주에서 돌하르방을 피해 다니기란 거의 불가능해요. 공항 출구에서도, 관덕정 앞에서도, 축제가 열린 원도심 골목 어귀에서도 그 얼굴이 먼저 우리를 맞아주죠. 툭 튀어나온 눈, 뭉툭한 코, 꾹 다문 입. 우리는 보통 거기까지만 보고 지나가요.
그런데 시선을 조금만 내려 보면 이상한 게 하나 눈에 들어와요. 바로 손이에요.
두 손이 불룩한 배 위에 얹혀 있는데, 나란하지가 않아요. 한 손은 조금 위, 다른 한 손은 조금 아래. 위아래로 엇갈려 포개져 있죠. 수백 년째 같은 자세로 서 있는 이 돌 할아버지는, 왜 하필 손을 이렇게 두었을까요.

Part.1 가장 흔한 대답, 문관과 무관
이 질문에는 이미 널리 알려진 답이 있어요. 오른손이 위에 있으면 글을 다루는 문관(文官), 왼손이 위에 있으면 칼을 다루는 무관(武官)이라는 거예요. 오른손이 위면 손님을 ‘환영’한다는 뜻이라는 이야기도 함께 돌고요.
깔끔한 설명이에요. 손 하나로 신분을 읽어내는 일종의 암호 같달까요. 기념품 가게 앞 하르방을 보며 “이건 문관이네” 하고 말해보는 재미도 있고요.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어요. 이 설명을 뒷받침하는 옛 기록이 없다는 거예요.
Part.2 숫자가 말해주는 것
돌하르방은 원래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 세 고을의 성문 앞에 서 있던 석상이에요. 지금은 47기가 남아 있어요. 제주시에 21기, 서귀포시 성읍리(옛 정의현)에 12기, 대정읍(옛 대정현)에 12기, 그리고 제주시에서 옮겨 간 2기가 서울 국립민속박물관 앞에 서 있죠.
이 손의 위치를 하나하나 들여다본 사람들이 있어요. 제주문화유산답사회 고영철 회장에 따르면, 성읍의 정의현 돌하르방은 동문과 서문 밖에 섰던 8기가 모두 왼손이 위에 있고, 남문 쪽 하르방들은 오른손이 위에 있대요. 손 모양이 사람이 아니라 문을 따라 갈리는 셈이에요.
제주시 쪽은 또 달라요. 삼성혈 입구에 마주 선 한 쌍은 손의 위아래가 서로 반대고, 제주대학교로 옮겨진 한 쌍도 동쪽 것은 왼손이, 서쪽 것은 오른손이 위에 있어요. 여기서는 문이 아니라 짝을 따라 갈리는 거죠. 그리고 대정현의 12기 가운데 2기는 아예 어느 손도 위에 있지 않아요. 두 손을 명치 부근에서 마주 대고 있거든요.
정의현은 문을 따라, 제주시는 짝을 따라, 대정현에는 아예 위아래가 없는 하르방까지. 하나의 규칙으로 읽어내기엔 세 고을이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고영철 회장은 손의 위아래로 문관과 무관을 가르는 해석을 두고 “후대의 추정”이라며 신중해야 한다고 적었어요. 손이 무엇을 뜻하는지 직접 말해주는 문헌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고요.
Part.3 이름에 남은 단서
손이 직접 말해주지 않는다면, 이 돌이 처음에 어떤 존재로 세워졌는지부터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어요.
‘돌하르방’이라는 이름은 생각보다 젊어요. 원래 아이들 사이에서 쓰던 말이었는데, 1971년 제주도 민속자료로 지정되면서 공식 이름이 됐어요. 그전까지 제주 사람들은 이 돌을 우석목, 무석목, 벅수머리라고 불렀대요. 그리고 옛 문헌에는 전혀 다른 이름이 적혀 있어요. 옹중석(翁仲石)이에요.
옹중(翁仲)은 중국 전설 속 인물이에요. 진시황 때 변방을 지키던 거구의 장수 완옹중이 죽자 그 모습을 본뜬 동상을 세웠는데, 흉노가 멀리서 동상을 보고도 진짜 옹중인 줄 알고 물러났다고 해요. 그 뒤로 중국에서는 궁궐과 무덤 앞을 지키는 석인(石人)을 두루 ‘옹중’이라 불렀어요.
20세기 초 김석익이 엮은 『탐라기년』에는 1754년(영조 30), 제주목사 김몽규가 이 ‘옹중석’을 성문 밖에 세웠다고 적혀 있어요. 기록을 남긴 사람에게 이 돌은 할아버지가 아니라, 문 앞을 지키는 석인의 계보에 서 있는 존재였던 거죠.
Part.4 문을 지키는 석인들은 손에 무언가를 쥔다
그렇다면 같은 계보의 석인들은 손을 어떻게 두었을까요.
조선 왕릉 앞의 문인석은 두 손으로 홀(笏)을 가슴 앞에 받쳐 들고, 무인석은 칼을 짚고 서 있어요. 석인의 손은 대개 그가 누구인지 말해주는 물건을 쥐는 자리예요. 홀을 들었으면 신하, 칼을 짚었으면 장수인 거죠.
그런데 돌하르방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홀도, 칼도 없이, 맨손 두 개가 배 위에 포개져 있을 뿐이에요.
Part.5 빈손이 놓인 자리
여기서부터는 기록이 아니라 해석이에요.
돌하르방이 서 있던 곳은 성문 앞이었어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돌하르방이 성문 앞의 경계 표지이자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는 금표(禁標) 역할을 했고, 관아의 위엄을 드러내는 동시에 성안을 지키는 수호신이기도 했다고 설명해요. 막아서는 존재이면서, 성을 드나드는 모든 사람이 가장 먼저 마주하는 얼굴이기도 했던 거예요.
그런 자리에 선 석상의 손이 비어 있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에게 두 손을 몸 앞에 모으는 건 예를 갖추는 자세예요. 어른 앞에서, 손님 앞에서, 의식에서 우리는 손을 포개고 서죠. 무기를 쥐지 않은 두 손을 앞에 모으면 ‘나는 당신을 해치지 않아요’라는 뜻이 되고요.
그런데 돌하르방은 동시에 눈을 부릅뜨고 한쪽 어깨를 치켜올리고 있어요. 위엄과 예의가 한 몸에 들어 있는 셈이죠.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고 막아서면서도, 문을 찾아온 사람은 맞아주는 문지기. 그렇게 보면 중요한 건 어느 손이 위에 있느냐가 아니라, 칼을 쥘 수도 있었던 손을 비워서 포개 두었다는 사실일지도 몰라요.

여기엔 섬의 돌도 한몫했을 거예요. 돌하르방은 대부분 구멍이 숭숭 뚫린 제주 현무암으로 깎았어요. 팔을 몸통에서 떼어 따로 새기기보다 배에 붙여 두는 편이 부서질 걱정이 덜하죠. 섬의 돌이 허락하는 방식과 문 앞에서 지켜야 할 예가, 같은 자세 안에서 만난 거예요.
Part.6 지킬 문이 사라진 뒤에도
우리는 손의 위아래에서 암호를 찾고 싶어 해요. 문관과 무관, 환영과 경계. 의미가 딱 떨어지면 마음이 편하니까요. 하지만 기록이 우리에게 남겨준 건 그보다 단순해요. 성문 앞에, 빈손을 포개고 서 있던 돌.
성곽이 허물어지면서 하르방들은 제자리를 잃고 여기저기로 흩어졌어요. 지금은 지킬 성문도 없는 공항과 골목과 축제장 어귀에 서 있죠. 그래도 그 손은 여전히 배 위에 포개져 있어요. 막아서면서 맞아주던 그 자세 그대로요.
다음에 돌하르방을 만나면 얼굴 대신 손을 한번 봐 주세요. 어느 손이 위에 있는지보다, 그 손이 왜 비어 있는지를요. 그리고 문득 궁금해질지도 몰라요. 내 손은 지금, 무엇을 쥐고 있는지.
참고 자료
현용준, 「돌하르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명칭, 현존 수, 기능(경계표·금표·수호신), 1754년 『탐라기년』 기록.
제주특별자치도, 「돌하르방」, 문화·민속 자료 — 현별 양식 차이, 1971년 공식 명칭.
고영철, 「[향토문화] 수호신.. 보성리 대정현 돌하르방」, 제주환경일보 (2017.4.19) — 정의현 손 위치, 문무관설 비판.
정진해, 「제주도 문화 상징적 의미 갖는 ‘돌하르방’」, 한국NGO신문 (2015.7.14) — 제주시 개체별 손 위치.
정성권, 「제주도 돌하르방의 기원과 전개」, 『탐라문화』 50호 — 대정현 2기 마주 대인 손, 성 훼손 후 흩어짐.
정성권, 「제주도 돌하르방의 기원 문제와 불교조각과의 관계」, 『몽골학』 70호 (2022) — 기원과 조성 시기.
좌동철, 「(18) 돌하르방의 기원은 논쟁 중」, 제주일보 (2016.12.12) — 자생·북방·남방 기원설.
프레시안, 알타이 돌사람과 은잔 발굴 기사 (pressian.com/pages/articles/49191) — 튀르크 석인상의 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