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같은 자리에서 짐을 싼다

제주의 1월 말은 좀 시끄럽다.

골목 하나를 두고 트럭이 서너 대씩 짐을 싣고, 옆집은 보일러를 갈고, 건너편 과수원집은 무너진 돌담을 다시 쌓는다. 마치 동네 전체가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일주일에 모든 걸 뜯고 옮기고 고친다.

처음엔 그저 번잡하다고 생각했다. 이사는 각자의 사정에 맞춰 흩어져서 하는 일인데, 왜 다들 하필 가장 추운 1월에, 한꺼번에. 그런데 몇 해를 같은 자리에서 같은 풍경을 보다 보니, 어느 순간 이게 번잡함이 아니라 일종의 의식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제주 사람들은 이 일주일을 신구간(新舊間)이라고 부른다.


신이 비운 틈

설명은 이렇다. 우리 삶의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신들이 한 해의 임기를 마치면 하늘로 올라가 새 신과 자리를 바꾼다. 묵은 신은 이미 떠났고 새 신은 아직 내려오지 않은 그 틈, 신이 잠시 자리를 비운 일주일. 그게 신구간이다.

평소엔 집 안 곳곳에 신이 깃들어 있어 함부로 벽을 허물거나 부뚜막을 옮기지 못했다. 그러다 신이 없는 이 틈을 타, 일 년 내내 미뤄둔 일들을 한꺼번에 해치우는 것이다. 대한이 지나고 닷새째부터 입춘 사흘 전까지, 양력으로 1월 말의 일주일. 그 안에 제주는 짐을 싸고 담을 쌓는다.

신구간 정의 - 한국민속신앙사전 대한 후 5일째부터 입춘 3일 전까지, 하늘의 신들이 지상에 없는 기간.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민속신앙사전: 가정신앙 편」

나는 이 풍습의 기원이 궁금해 한참을 뒤졌다. 그런데 캐면 캘수록 묘했다. 조선시대 기록에도, 유배 온 선비들의 글에도,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의 문헌에도 신구간은 없었다. 활자로 처음 등장하는 건 1953년 제주신보 기사다. 학자들은 그 뿌리를 옛 책 『천기대요』에서 찾지만, 그 책은 육지에서도 읽혔는데 왜 신구간은 제주에만 남았는지, 그건 지금도 아무도 모른다.

한동안 나는 이게 사실이냐 미신이냐를 따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내가 질문을 잘못 들고 있다는 걸 알았다.


중요한 건 신이 아니었다

신이 정말 자리를 비우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한 사회가 일 년에 단 한 번 다 함께 멈추고, 비우고, 새로 시작하기로 약속한 시간을 가졌다는 것이다.

왜 이 풍습이 그토록 끈질기게 살아남았는지를 생각하다가, 나는 ‘반복’이라는 단어에 닿았다.

사람들은 대부분 반복적인 삶을 산다. 매일 같은 출근을 하고,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사람들을 만난다. 시지프스가 돌을 굴려 올리면 다시 굴러 내려오듯, 일과 삶의 많은 부분은 그렇게 반복으로 채워진다. 그 반복을 견디지 못하면 일은 금세 넌더리 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반복을 끊어주는 매듭이 필요하다. 묵은 것을 한 번 비우고, 다시 시작점에 서는 순간. 신구간은 정확히 그 매듭이었다.

생각해보면 절묘하다. 농사도 멈춘 한겨울의 한복판, 일 년 내내 미뤄둔 것들을 마침내 손볼 수 있는 시간.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온 동네가 동시에. 옆집도 이사하니 눈치 볼 것 없고, 다들 고치니 서로 거들 수 있다. ‘신이 비운 틈’이라는 말은, 어쩌면 이 다 함께하는 비움과 시작을 누구도 미루지 못하게 만든, 가장 다정한 명분이었는지도 모른다. 신이 허락한 시간이라는데, 누가 굳이 미루겠는가.

미신의 껍질을 한 꺼풀 벗기면, 그 안에는 일상을 다시 바라보는 오래된 기술이 들어 있었다.


비움이 만드는 선순환

나는 일이든 삶이든, 성장보다 생장(生長)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무리해서 키우는 게 아니라, 뿌리를 단단히 한 채 계절을 의식하며 자연스럽게 자라는 것. 굴곡점에서 우울해하지 않는 것. 겨울이 오면 침울해하는 대신, 겨울에 대한 인식 자체를 바꾸는 것.

신구간을 만든 사람들이 꼭 그랬다. 가장 춥고 가장 모든 게 멈추는 시기를, 그들은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매듭’으로 바꿔놓았다. 묵은 것을 비워야 새것이 들어올 자리가 생긴다는 걸, 굳이 신을 빌려서라도 매년 실천했다.

그리고 비움은 혼자 끝나지 않는다. 한 집이 묵은 것을 비우고 새로 단장하면, 그 좋은 기분은 옆집으로, 골목으로, 동네 전체로 퍼진다. 온 동네가 같은 일주일 동안 새 출발선에 서는 것이다. 좋은 기분은 씨앗과 같아서, 한 집에서 시작된 것이 반드시 동네로 퍼지고, 동네의 기운이 다시 그 집으로 돌아온다. 신구간은 그 선순환을, 무려 마을 단위로 설계해둔 풍습이었다.


당신의 신구간은 언제인가

이제 우리는 신을 핑계 삼지 않아도 아무 때나 이사할 수 있는 시대에 산다. 편리해졌다. 그런데 그만큼 우리는, 다 함께 멈추고 비우는 시간을 잃어버렸다.

각자 흩어져 각자의 속도로 사느라, 묵은 것을 갈아엎고 새로 시작하는 일조차 혼자 결심하고 혼자 해내야 하는 시대. 어쩌면 제주 사람들이 신구간을 끝내 놓지 못한 건, 효율 때문이 아니라 그 ‘함께 다시 시작하는 감각’이 그리워서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가끔 일이 너무 밀려서 정신이 없을 때, 오히려 밖으로 나가 산책을 한다. 닥치는 대로 하다 보면, 정작 무엇이 중요한지를 자꾸 잊어버린다. 그럴 때 산책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한다. 그러면 잊고 있던 더 중요한 일이 떠오르기도 하고, 밀린 일을 단번에 풀어낼 묘수가 떠오르기도 한다. 신구간은 그것의 일 년짜리 버전 같다. 일 년에 한 번, 묵은 것을 비우고 마음을 다시 세팅하는 큰 청소.

그러니 이건 결국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당신은 일 년에 한 번, 묵은 것을 비우고 새로 시작하는 당신만의 신구간을 가지고 있는가. 신이 비워준 그 일주일은, 어쩌면 우리가 스스로를 다시 닦으라고 비워둔 자리였는지도 모른다.


본질을 탐구하고, 그것을 재해석합니다. 제주랩스.


참고 자료

  1. 윤용택, 「‘신구간(新舊間)’ 풍습의 현대적 의미(上)」, 제주일보 (jejunews.com) — 신구간의 기원 미상, 1953년 제주신보 최초 기록, 『천기대요』 세관교승조 관련 내용 출처
  2. 「문화상징100선 ─ 신들의 이동, 신구간」, 제주학아카이브 (jst.re.kr) — 신구간의 정의 및 기간(대한 후 5일~입춘 전 3일)
  3. 「제주도의 신들의 임무교대 기간 ‘신구간’」, 전통문화포털 한국문화재재단 (kculture.or.kr) — 신들의 임무교대 세계관
  4. 「큰 추위라지만 머잖아 봄…대한(大寒)」, 농민신문 (2026) — 대한·입춘 절기와 신구간 기간
  5. 성여훈, 『천기대요(天機大要)』(1636) 세관교승(歲官交承)조 — 신구세관 교대 시기 관련 원전
  6. 성격·태도(좋은 기분의 선순환, 반복 속의 매듭, 성장이 아닌 생장)에 관한 관점: 박정수(녹싸), 『좋은 기분』(북스톤) 및 점프(jumpsp.org) 인터뷰 「서로의 일과 삶을 돌보는 태도에 대하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