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윤찰나
낮에는 향긋한 커피가, 밤에는 시원한 하이볼과 칵테일이 테이블 위를 채웁니다. 제주시 원도심 관덕로(관덕로 40), 오래된 정취를 품은 이곳에는 매달 제주의 제철 식재료와 새로운 기획으로 사람들을 맞이하는 공간 ‘먼슬리 제주(Monthly Jeju)’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조용히 하루를 달래러, 누군가는 낯선 이와 기꺼이 대화를 나누기 위해 이곳의 문을 두드립니다. 그렇게 공간에는 매일 사랑방 같은 느긋한 활기가 자연스레 피어납니다. 그리고 그 바(Bar) 너머에는 쉴 새 없이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낯선 이들의 대화를 편안하게 엮어주는 정순덕 대표가 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경찰을 꿈꾸며 고시라는 험난한 언덕을 오르던 그녀는, 어쩌다 제주에서 등대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공간의 주인이 되었을까요? 무언가를 놓아버리기 위해 쫓기듯 찾았던 섬에서, 비로소 가장 나다운 길을 찾아낸 그녀의 이야기를 찬찬히 따라가 보았습니다.
Part.1 18년의 꿈을 억지로 끊어내며 당도한 섬
“명탐정 코난을 보며 초등학교 때부터 경찰만 꿈꿨어요. 대학교도 당연히 경찰행정학과를 갔죠. 그런데 고시 공부라는 게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하다 보니 미련을 놓기가 참 힘들더라고요.”
그녀는 꿈을 향해 지독하게 파고들었습니다. 집중을 흩트리는 노량진 고시촌의 번잡함을 뒤로하고, 에어컨조차 없는 경북 영천의 깊은 사찰로 들어가기도 했죠. 뜨거운 볕이 내리쬐는 산속 정자에 머물며 새벽 4시 반이면 일어나 스님들과 예불을 드리고 홀로 책과 씨름했습니다. 하지만 기약 없이 길어지는 고시 생활은 멈춰버린 시간 속에 그녀를 가둬둘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묵묵히 버텨내던 중, ‘진짜 마지막’이라 다짐하며 치렀던 시험이 끝난 어느 날. 그녀는 마침내 삶의 방향을 수정해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습니다. 하지만 18년 넘게 쥐고 있던 꿈을 책상머리에서 단숨에 놓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죠. 꿈을 강제로라도 끊어낼 물리적인 ‘도피처’가 절실했습니다. 그렇게 쫓기듯 짐을 싸서 당도한 곳, 그곳이 바로 제주였습니다.

Part.2 닫힌 세상을 열어준 타인의 이야기
제주 서귀포의 한 게스트하우스 스태프로 일하며, 좁은 방 안에 갇혀 있던 그녀의 세상은 비로소 바깥을 향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모닥불 앞에 모여앉아 낯선 이들이 풀어내는 다양한 직업과 지난 삶의 흔적을 듣는 일. 그것은 상처받은 마음을 가만히 보듬어주는 예상치 못한 위로였습니다.
그렇게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로 얼어붙었던 마음을 녹여내며 조금씩 생기를 되찾아갈 무렵, 그녀에게 새로운 삶을 향한 뜻밖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우연히 게스트하우스의 산책 가이드 일을 맡게 된 것이죠. 사람들을 모아 올레길을 걷고, 새연교의 노을을 본 뒤 시장에서 먹거리를 사 와 파티를 여는 코스. 그녀가 정성껏 깔아놓은 판 위에서 낯선 이들의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어날 때, 그녀는 경찰이라는 오랜 꿈 말고도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했습니다.
“내가 프로그램 관련해서 기획하고 운영하는 일을 정말 재미있어하는구나, 그때 처음 알았어요. 정말 경찰 말고는 하고 싶은 게 없이 살았는데 말이죠.”

Part.3 서울, 캐나다, 다시 제주. 내 공간을 향한 치열한 여정
제주 게스트하우스에서 우연히 발견한 ‘기획’이라는 새로운 불씨는 그녀의 발걸음을 다시 육지로 이끌었습니다. 제대로 된 기획 업무를 현장에서 부딪혀가며 배워보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죠.
그렇게 상경해 들어간 서울의 한 대행사에서, 그녀는 정신없이 기획 실무를 배우며 치열한 날들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서른이라는 나이가 저만치서 보이기 시작할 무렵, 가슴 한구석에 묻어두었던 ‘워킹홀리데이’라는 오랜 갈망이 다시 고개를 들었습니다. 경력 단절에 대한 두려움보다 낯선 세상으로 부딪혀보고 싶다는 열망이 더 컸죠.
캐나다라는 아주 먼 땅으로 떠나기 전, 그녀는 다시 제주의 품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과거 제주에서 머물며 느꼈던 따스한 삶의 감각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어서였죠. 이번에는 잠시 머무는 여행자가 아닌 도민으로서, 일상을 살아볼 마음이었습니다.
그렇게 텀을 두고 다시 찾은 제주, 애월 곽지 해변의 거대한 라운지 바(Bar)에서 일하며 그녀는 제주라는 섬이 가진 묘한 마법을 깨달았습니다.
“일상에 지친 육지를 떠나온 분들은 하나같이 마음이 활짝 열려 있었어요. 그 밝고 여유로운 에너지를 마주하며 대화를 나누는 게 저한테도 벅찬 기쁨이었죠. 그때 처음 생각했어요. 아, 언젠가 제주에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는 나만의 공간을 차려야겠다고요.”
그렇게 공간에 대한 열망을 가슴에 품은 채, 그녀는 캐나다 밴쿠버로 떠납니다. 아는 사람 하나 없고 영어도 서툰 그곳에서의 첫 달은 지독한 우울의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낯선 환경이라는 높은 벽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오히려 일을 하며 돌파구를 찾는 특유의 뚝심으로, 말단 서버부터 매니저 자리까지 악착같이 버텨냈죠.
귀국 후 다시 제주 라운지 바의 부름을 받고 돌아온 그녀의 마음속에는 선명한 목표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바로 ‘언제든 가볍게 들를 수 있는 나만의 바(Bar)를 차리는 것’. 제주의 청년 인재 양성 프로그램인 ‘더큰내일센터’는 머릿속에만 맴돌던 막연한 기획을 현실로 길어 올리는 단단한 마중물이 되어주었습니다. 그곳에서 공간의 철학부터 비즈니스 모델까지 치열하게 깎고 다듬으며 독립을 준비했고, 마침내 ‘먼슬리 제주’라는 자신만의 공간을 세상에 꺼내놓게 됩니다.
Part.4 세상과 사람을 향한 애정 어린 시선
3톤에 달하는 천장 폐기물을 직접 뜯어내고 오래된 벽을 허무는 과정은 고되었습니다. 하지만 텅 빈 공간을 마주한 그녀에게 그 시간은 막막함이 아니라, 내 손으로 온전한 나만의 세상을 만들어간다는 설렘으로 가득 찬 즐거운 순간들이었습니다.
공사를 하던 틈틈이 그녀는 매장 앞에서 무작정 붕어빵을 구워 팔기 시작했습니다. 굽는 속도가 느린 초보 사장의 매대 앞에는 동네 어르신들이 머물며 수다를 떨었고, 공사장은 어느새 따뜻한 동네 사랑방이 되어 있었죠. 육체적으로 고단했던 그 시기, 그녀를 일으켜 세운 건 결국 ‘사람’이었습니다. 사람과 부대끼며 마음을 나누는 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저 사람은 오늘 어떤 마음으로 제주에 왔는지 살피는 습관이야말로 그녀가 매일을 기꺼이 버티게 하는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녀는 사람을 향한 이 깊은 애정을 ‘이타적 이기심’이라는 단어로 덤덤하게 설명합니다.
“저는 제 스스로를 ‘이타적 이기심’을 가진 사람이라고 표현해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어울릴 수 있게 판을 짜주고, 즐거운 기억을 선물하는 건 이타적인 행동이잖아요. 하지만 결국 그걸 통해 가장 큰 희열과 에너지를 채우는 건 ‘저 자신’이거든요. 손님들이 ‘덕분에 제주 여행이 너무 즐거웠다’고 말할 때, 저는 사실 제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일하는 셈이죠.”
사람을 진심으로 아끼는 마음은 자연스레 공간의 결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쉴 새 없이 손님들의 사연을 스펀지처럼 흡수하고, 그것을 또 다른 이에게 자연스럽게 이어줍니다. 얼마 전에는 조종사가 꿈이었던 자매 손님과, 혼자 찾아온 현직 대한항공 부기장 손님이 우연히 마주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녀가 슬쩍 놓아준 대화의 징검다리 덕분에, 부기장님은 몇 시간 동안 자매의 질문에 성심껏 대답해 주고 귀한 비행기 굿즈를 남겨주기로 약속했죠. 감동한 자매는 부기장님이 다시 오시면 꼭 내어달라며 칵테일 한 잔을 미리 결제해 두고 떠났습니다.
누군가의 이야기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닿아 위로와 응원이 되는 순간. 그 교감의 한가운데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 그것이 사람을 좋아하는 정 대표가 매일 밤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며 바 테이블을 지키는 진짜 이유입니다.
Part.5 흔들리는 매일 밤, 조용히 다잡은 단 하나의 원칙
오픈한 지 이제 갓 한 달. 오후부터 새벽 3시까지 홀로 매장을 지키는 강행군 속에 그녀의 몸과 마음은 조금씩 지쳐갔습니다. 텅 빈 거리를 바라보며 밀려드는 불안감이 고개를 들기도 했죠. 주위의 단골손님들이 “애기 사장”이라 부르며 건네는 애정 어린 걱정과 조언들은, 때로는 그녀로 하여금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정말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내면의 고민이 깊어질 때마다, 그녀는 공간의 크기나 회전율 같은 단순한 지표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로 다짐했습니다. 현실적인 압박에 쫓기다 보면 흔들릴 법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녀가 결코 놓지 않으려는 중심이 있습니다. 숫자가 주는 유혹 대신,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밀도에 집중하겠다는 마음입니다.
이 위태로운 흔들림을 다시금 단단하게 잡아준 것 역시, 위기의 순간 찾아온 한 손님의 세심한 배려였습니다.
“하루는 낮술에 취해 거칠게 행동하는 손님 때문에 정말 난처한 적이 있었어요.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한쪽 테이블에 앉아 계시던 커피 손님이 조용히 비즈 공예를 꺼내 들고는 자리를 지켜주시더라고요. 나중에 그 무례한 손님이 나가고 나서 저한테 ‘제가 먼저 가버리면 사장님이 더 힘드실 것 같아서, 저 사람 갈 때까지 끝까지 자리에 있었어요’라고 말씀하시는데, 정말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죠.”
정 대표는 그날 조용히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테이블 위의 영수증 숫자를 좇기보다, 이 공간을 진심으로 아껴주는 사람들의 마음을 먼저 지켜내겠다고 말이죠. 당장의 화려한 매출보다 서로를 배려하는 느슨한 연대가 쌓일 때, 비로소 이 공간이 오래도록 숨 쉴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이제 알고 있습니다.

Part.6 모든 궤적의 끝에서 다시, ‘사람’
당장의 수치 대신 사람을 남기겠다는 그 다짐은, 자연스레 그녀가 그리는 미래의 지도로 이어집니다. 10년 뒤의 청사진을 묻는 질문에 그녀는 “먼슬리 강릉, 먼슬리 부산처럼 다양한 지역에서 저마다의 결을 가진 매력적인 공간들을 계속 기획해 보고 싶다”며 기분 좋은 상상을 펼쳐 보였습니다.
그 행복한 상상의 끝에서, 정 대표는 문득 오늘 인터뷰 내내 풀어놓았던 자신의 과거와 현재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18년 넘게 매달렸던 경찰이라는 꿈과, 사람들에게 편안히 머물 곳을 내어주고 싶은 지금의 마음. 완전히 끊어진 줄 알았던 그 삶의 조각들은 결국 ‘사람을 지킨다’는 하나의 본질을 향해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경찰을 꿈꿨던 것도 결국 사람을 지키고 싶어서였어요. 경찰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사람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직업이라면, 지금의 저는 ‘공간’이라는 따뜻한 테두리 안에서 사람들의 헛헛한 마음을 감싸주고 있는 셈이더라고요. 일상에 지친 분들이 이곳에서만큼은 완전히 무장해제된 채로 위로받고, ‘오늘 정말 잘 쉬었다’는 기분 좋은 기억을 안고 돌아가게 하는 것. 그게 제가 이 공간에서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입니다.”
18년을 품어온 꿈과 작별하기 위해 찾아왔던 섬. 하지만 그 시간들은 결코 버려지거나 엉뚱한 곳으로 흘러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을 지키고 싶다던 오랜 꿈은 형태만 바뀌었을 뿐, 지금 이 공간의 단단한 뿌리가 되어 누군가의 밤을 편안하게 안아주고 있습니다. 흩어진 줄 알았던 시간들이 모여 지금의 단단한 기획자 정순덕을 만들었듯, 그녀가 앞으로 기획할 새로운 공간의 문턱에도 지나온 다양한 순간과 경험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단단한 토대 위에서, 그녀는 앞으로도 찾아오는 사람들과 함께 수많은 다채로운 순간들을 끊임없이 기획하고 만들어 나가겠죠.

에디터 윤찰나
오랜 꿈을 내려놓는 일을 우리는 종종 ‘실패’나 ‘단절’이라 부르곤 합니다. 언론고시의 좁은 문 앞에서 수없이 무너져 내렸던 저 역시, 닿지 못한 그 긴 시간들이 그저 헛되이 버려진 것이라 여겼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주시 원도심, 먼슬리 제주의 바 테이블에 앉아 정순덕 대표와 깊은 대화를 나누며 저는 조용히 깨달았습니다. 우리 삶에 무의미하게 버려지는 시간은 결코 없다는 사실을요.
경찰을 향해 달렸던 18년의 치열함, 산속 정자에서 견뎌낸 고독, 낯선 타지에서 몸으로 부딪혀 얻은 생존의 감각. 전혀 달라 보이던 그 파편들이 모여 지금의 기획자 정순덕을 만들었습니다. 소녀 시절 품었던 꿈은 형태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이곳에서 낯선 이들의 즐거운 시간과 기분 좋은 웃음을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죠.
정 대표가 건네는 위로 속에서 문득 우리 앞의 길을 돌아보게 됩니다. 혹시 지금 걷고 있는 길이 처음 꿈꿨던 목적지와 조금 다르더라도 너무 불안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묵묵히 찍어온 삶의 점들은 결국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아름다운 선을 이어갈 테니까요. 우리가 걸어온 그 묵묵한 발자취를 덤덤히 응원하며, 오늘도 먼슬리 제주의 불빛은 관덕로의 밤거리를 조용히 밝히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