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윤찰나
매일 똑같이 굴러가는 일상 속에서, 우리는 종종 마음을 기댈 작은 틈을 찾게 됩니다. 해야 할 일과 지켜야 할 규칙들에 쫓기다 보면, 내가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건지 의문이 들 때도 있죠.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에서 우리가 놓치지 않고 붙잡아야 할 중심은 어디에 있을까요.
여기, 회사 생활을 견디며 퇴근 후 조용히 펜을 들어 자신만의 이야기를 종이 위에 그려가던 사람이 있어요. 수많은 이들의 일상에 작은 쉼표를 던지는 인스타툰 ‘지토툰’의 작가이자, 제주시 관덕로 한편에서 소품샵 ‘지토의 숲’을 가꾸어가는 유지안 작가의 이야기입니다.
그녀의 20대는 결코 녹록지 않은 현실의 벽과 부딪히는 과정이었어요. 강압적인 직장 문화, 성장 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마주한 불안감. 하지만 유지안 작가는 그 무거운 공기 앞에서 도망치는 대신, 펜을 쥐고 자신의 엉킨 감정들을 하나씩 풀어나갔죠.
지토툰이 10만 명이 넘는 이들의 마음을 두드린 이유도 바로 이 지점에 있어요. 만화 속 지토의 모습은 단순하지만, 그 위로 흐르는 일상의 틈새를 포착하는 시선은 예리해요. 사람들은 정형화된 인생론보다, 자신의 하루를 정확히 들킨 듯한 그 평범한 순간에 더 오래 머물렀어요.
한 숨이 깃든 한 장의 종이가 수많은 이들의 쉼터가 되기까지, 그녀가 마주했던 순간들을 따라가 보려 합니다.
PART.1 교과서 한 쪽의 낙서
유지안 작가의 이야기는 교과서 한 쪽의 작은 낙서에서 시작됩니다.
수업 시간, 친구들의 얼굴을 쓱쓱 그려주던 학생. 특징을 잡아 귀엽게 표현하면 친구들은 까르르 웃었고, 이내 “나도 그려줘”라는 말이 줄을 이었어요. 어느 날은 그림을 담임 선생님에게 들키고 말았지만 꾸중 대신 자신의 얼굴도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았죠. 그 낙서는 교무실의 작은 자랑거리가 되었고, 매달 학교 교지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그림은 아직 직업도, 브랜드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누군가를 가만히 관찰하고, 특징을 손끝으로 옮겨 상대방을 웃음 짓게 만드는 순수한 즐거움이었습니다.
하지만 좋아하는 마음이 언제나 곧장 직업으로 이어지지는 않잖아요. 누군가를 관찰하고 웃음 짓게 하던 그녀의 시선이 마주한 첫 사회는 생각보다 꽤 무겁고 보수적이었어요. 졸업 후 발을 내디딘 첫 직장, 해외 무역 회사는 의자에도 직급이 있던 세계였습니다.
“제 자리에 놓인 의자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상무님이 오시더니 불호령을 내리시더라고요. ‘네가 주임인데 왜 과장급 이상만 앉는 목받이 의자에 앉아 있냐’는 거였죠. 누구 하나 가르쳐 준 적 없는 서열이었지만, 당장 의자를 바꾸라는 핀잔을 들어야 했어요. 대표님이 층에 내려오시면 모든 신입사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르며 인사를 해야 했죠. 제 목소리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동료들이 다 일하고 있는 사무실 한복판에서 세 번 연속으로 인사를 다시 시키기도 했습니다.”
막내라는 이유로 감당해야 했던 자잘하고 불합리한 일들. 시간이 지나며 업무는 사이클처럼 반복되었고, 하루에도 몇 개씩 쌓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억울한 순간들은 마음속에 조용히 고이기 시작했죠.
PART.2 감정들을 외면하지 않고 정직하게, 공감이라는 자산으로 돌아오다
낮 동안 회사에서 맡은 일을 성실히 해내도, 퇴근길에 밀려드는 답답함은 쉽게 가시지 않았죠. 친구들에게 털어놓는 것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던 직장 생활의 모순들. 2018년, 유지안 작가는 일상의 틈새에서 다시 펜을 들었어요. 펜촉은 선으로, 선은 이야기로. 지토툰의 첫 페이지는 그렇게 퇴근길의 작은 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지토툰의 중심을 지키는 캐릭터 ‘지토’는 특유의 둥글고 귀여운 생김새를 가졌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묶어둔 진짜 힘은 10컷의 도화지 안에 풀어놓은 찰나의 순간들에 있었습니다.
“물어보면 왜 물어보냐고 하고, 안 물어보면 왜 안 물어보냐고 하는” 모순적인 직장 문화. 거창한 서사 대신 눈치와 서글픔이 교차하는 작은 장면들 앞에서, 독자들은 만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듯한 깊은 공감을 경험했죠.
콘텐츠가 범람하는 시대에 연재 1년 만에 4만 명, 이내 10만 명의 마음을 사로잡은 비결은 복잡한 마케팅 전략이 아니었습니다. 타겟을 분석하고 억지로 트렌드를 좇는 것 보다는, 자신이 겪은 불합리함과 고인 감정들을 외면하지 않고 정직하게 기록한 것. 개인적이고 솔직한 서사가 역설적이게도 대중에게 강력한 ‘공감’이라는 자산으로 돌아온 셈입니다.

PART.3 섬으로 옮긴 도화지
온라인 세상에서는 매일 새로운 독자들을 만나고 있었지만, 매일 서류를 검수하는 현실의 업무는 똑같은 사이클의 반복이었습니다. 새로운 케이스도, 더 이상의 커리어적 성장도 없는 나날들. 마음 한구석에 고인 ‘이대로 머물다 세상에 뒤처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죠.
서른이 가까워질 무렵. 지독한 회사 생활을 함께 견뎌내던 동기들마저 대거 퇴사를 선택하자 그녀의 마음도 거세게 흔들렸어요. 결국 지안 작가는 지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고 제주로 향했습니다. 나 홀로 떠나온 퇴사 여행이었죠.
하지만 섬은 그녀에게 단순한 도피처로 머무르지 않았어요. 여행 중에 우연히 제주에 살던 친구를 통해 디자인 직무 면접을 보게 되었고, 뜻밖의 합격 소식을 받게 된 것입니다. 제주에서 다시 시작할 것인가, 육지의 익숙한 삶으로 돌아갈 것인가. 스물아홉의 가을, 일주일 동안의 고민 끝에 그녀는 과감히 짐을 쌌습니다.
섬으로 생활 반경을 옮기자 콘텐츠의 결도 넓어졌어요. 이전의 이야기가 직장 생활의 치열한 생존기에 가까웠다면, 이제는 제주에서의 일상들이 도화지 위에 차곡히 채워지기 시작했죠. 쳇바퀴를 벗어난 섬에서 그녀는 자신만의 속도로 창작자로서의 세계를 단단하게 확장해 나가고 있었어요.

PART.4 화면 밖으로 나온 지토
화면 너머로 소통하는 일은 커다란 기쁨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실제 공간에서 사람들의 눈을 직접 마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그녀. 그렇게 회사를 나와 준비한 끝에, 소품샵 ‘지토의 숲’이 문을 열었어요.
이곳의 상징이 된 ‘색연필 캐리커처’는 처음부터 치밀하게 계획된 비즈니스 모델이 아니었어요. 어느 고요했던 플리마켓 날, 찾아오는 손님이 없어 심심한 마음에 옆 부스 대표님의 얼굴을 쓱쓱 그려 선물했던 우연이 시작이었죠. “판매용으로 해보라”는 이웃의 응원이 마중물이 되어, 캐리커처는 자연스레 공간의 한 축이 되었어요.
유지안 작가는 인물의 단점을 과장해 우스꽝스럽게 묘사하지 않아요. 얼굴의 콤플렉스는 부드럽게 감싸고, 그날 손님이 입고 온 옷의 디테일과 소품, 신발 끈의 모양까지 있는 그대로 도화지에 옮기죠. 그리고 인물의 배경 뒤로 제주의 바다, 돌담길, 한라산 중 손님이 마음에 가장 깊이 담아둔 풍경을 정성스레 심어줍니다.
작은 도화지 위에 그리고 있던 것은 단순한 얼굴이 아니라, 그 사람이 제주라는 섬에서 보낸 하루와 여행의 조각들이었습니다. 손님이 섬에 머물며 마주했던 시간을 가만히 살피고 정성스레 남겨주는 것, 그것이 지토의 숲이 가진 방식이었습니다.

PART.5 쉬어가는 법
매주 새로운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 연재의 과정에서 항상 아이디어가 넘쳐날 수는 없어요. 지토툰의 독자가 늘어날수록 더 좋은 공감을 전하고 싶다는 마음은 자연스레 고민으로 이어졌고, 때로는 묵직한 권태기가 찾아오기도 하죠.
한때 그녀는 생각이 막혀도 억지로 그려보기도 했다고 해요. 하지만 그렇게 짜낸 작업물은 컨디션이 좋을 때 그린 것과 퀄리티 면에서 차이가 났어요. 그 경험을 거치며 유지안 작가는 마음이 좋지 않을 때는 차라리 과감하게 쉬어가는 법을 택했어요.
“안 좋을 때는 좀 쉬고 그 기간을 빨리 넘기려고 노력해요. 쉴 때는 아이패드랑 멀어지죠. 디지털 디톡스 하면서 밖의 제주도 풍경도 보고 잡생각도 줄이려고 하고요. 동쪽에 있는 돌문화공원을 좋아해요. 장엄하고 멋있어서 생각 정리하기 좋아요.”
아이패드를 내려놓고 돌문화공원의 광활한 들판과 돌들 사이를 걷는 시간. 이 비움의 시간은 그녀가 창작의 방향을 다시 점검하는 방식입니다. 일상의 틈새에서 건져 올린 이야기들이 독자에게 닿기까지, 그녀는 펜을 잠시 내려놓고 다음 이야기를 채울 준비를 해요.
PART.6 10년 후, 그리고 그 후로도 지켜낼 가치
그녀가 그리는 청사진은 넓고 다채로워요. 지토툰이라는 단단한 중심축을 바탕으로 콘텐츠의 세계를 확장하는 것이죠.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건 참 많아요. 웹툰 작가는 사업 확장의 파이프라인이 어디로든 뻗어 나갈 수 있거든요. 지토를 기반으로 한 테마파크를 상상하거나, 일상툰의 경계를 넘어 동화 같은 소설, 드라마나 영화 같은 새로운 장르에 도전해보는 상상도 합니다.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정말 매력적이고, 저는 이 직업을 아주 사랑해요.”
가능성을 상상하는 즐거움 속에서도 그녀가 붙잡고 있는 삶의 본질은 소박해요. 스스로를 거창하게 정의 내리기보다, 나를 찾아와 준 이들이 기억하는 온화하고 다정한 모습 그대로 남는 것. 유명세가 주는 거만함을 경계하며, 누구를 만나든 주어진 인연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입니다.
“유명해지면 거만해지기 쉽잖아요. 저는 그걸 가장 경계해요. 강의를 가거나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도 ‘내 경력이 이만큼이다’가 아니라, ‘우리는 처음 만났지만 저는 당신에게 제가 가진 최선을 다할 겁니다’라는 자세를 유지하려고 해요. 그래야 오래 걸을 수 있거든요. 그게 저의 가치관이자 모토입니다.”

PART.7 너나우리
교과서 모서리의 작은 낙서로 시작해 10만 명의 마음을 움직이는 창작자가 되기까지, 지안 작가의 여정이 늘 순탄했던 것만은 아닙니다.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그녀가 처음 인스타툰을 시작했을 때, 주변에는 조언을 구할 수 있는 동료 작가도, 막막함을 나눌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고 해요.
계약서를 작성하는 법부터 포트폴리오를 꾸리는 일, 심지어 첫 강의 요청을 받고 강의 자료를 만드는 사소한 순간까지. 모든 과정이 맨땅에 헤딩하듯 막막한 청춘의 연속이었어요. 그 외롭고 답답했던 감정을 잘 알기에, 유지안 작가는 이제 자신의 뒤를 걸어올 후배들과 자신처럼 새로운 사업 모델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기꺼이 징검다리가 되어주고 싶어 합니다.
거창한 후배 양성 프로그램을 계획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저 어느 날 불쑥 DM으로 “계약서는 어떻게 써야 하나요?” 하고 막막함을 토로하는 이가 있다면, 먼저 그 길을 걸어간 선배로서 조금 더 친절하게 가이드라인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을 뿐입니다.
“물어볼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참 막막했거든요. 앞으로는 누군가 저한테 물어보면, 그래도 조금 더 친절하게 알려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내가 누군가를 도와주면 결국 그게 또 나에게 돌아오더라고요. 언젠가는 그렇게 서로 돕고 도움을 주고받는 사람으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에디터 윤찰나
인터뷰를 마치고 초본을 다듬으며, 오래 사랑받는 캐릭터에는 어떤 매력이 있는 것일지에 대해 잠깐 고민해봤어요. 단순히 보기 좋아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지토를 예로 들어볼까요? 지토라는 그림 안에는 작가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담겨 있어요. 어떤 상황에서도 대상을 온기로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요. 현실의 벽들을, 그녀는 펜 끝으로 묵묵히 통과해 왔어요. 주저앉는 대신 펜을 들었죠. 엉켜 있던 자신의 감정을 선으로 풀어내고, 그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다독였습니다. 이런 태도와 이야기가 쌓여 캐릭터에 거대한 힘을 더해주는 것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봤습니다.
지토가 머무는 곳에 늘 사람이 있었던 것은 어쩌면, 작가가 그들을 멀리서 관조하지 않고 자신의 그림 곁으로 불러들였기 때문이라 확신해요.
나의 일기장을 들킨 것만 같은 공감은, 결국 스스로에게 지극히 정직했던 한 사람의 기록에서 시작된 셈입니다. 마음의 짐을 외면하지 않고 묵묵히 선을 그어 나간 태도가 수많은 이들의 마음에 작은 쉼표를 선물한 것이죠. 그렇다면 유지안 작가가 쥐었던 그 작은 펜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손에도 쥐어져 있을지도 몰라요.
돌아보면 우리들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아무도 모르게 벽 하나가 우리를 가로막을 때가 있습니다. 막막하고 불안하죠. 그럴 때 유지안 작가가 펜을 들었듯, 당신만의 방식으로 마음의 온기를 꺼내어 그 벽을 한번 넘어서 보는 건 어떨까요.
거창한 도약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자신만의 펜을 잡는 일, 선을 긋는 그 작은 시작이 마침내 벽을 넘어서는 단단한 용기를 불어넣어 줄 것이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