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에서 제주로 이사 온 사람들이 가장 먼저 당황하는 단어가 있다. ‘연세(年貰)‘다.
방을 보러 다니다 보면 월세도 전세도 아닌, 처음 듣는 말이 나온다. 1년 치 집세를 한꺼번에, 그것도 선불로 낸다는 것이다. 수백만 원에서 천만 원이 넘는 돈을 계약하는 날 통째로 건넨다. 처음 듣는 사람은 대개 되묻는다. “그걸 왜 한 번에 내요?”
나도 처음엔 그저 제주가 목돈을 좋아하는 동네인가 보다 하고 넘겼다. 그런데 이 관습이 어디서 왔는지 궁금해 뿌리를 따라가 봤더니, 뜻밖의 곳에 닿았다. 그리고 마지막엔, 계약이라는 딱딱한 단어 뒤에 숨어 있던 아주 인간적인 마음 하나를 만났다.
1. 신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연세를 이해하려면 먼저 ‘신구간(新舊間)‘을 지나야 한다.
제주에는 대한(大寒) 닷새 뒤부터 입춘(立春) 사흘 전까지, 약 일주일간 신들이 자리를 비운다고 믿어온 시간이 있다. 한 해 동안 마을을 지키던 신들이 임기를 마치고 하늘로 올라가고, 새 신은 아직 내려오지 않은 틈. 이 틈에는 이사를 하든 집을 고치든 무엇을 해도 탈이 나지 않는다고 여겼다. 지켜보는 신이 없으니까.
그래서 제주 사람들은 이 일주일 사이에 다 같이 이사를 했다. 마을 전체의 이삿날이 사실상 이 한 주에 몰려 있었던 것이다.
2. 그래서 ‘1년’이 태어났다
여기서 연세의 정체가 드러난다.
모두가 신구간에 이사를 하니, 집을 빌리는 기간도 자연스럽게 ‘이번 신구간부터 다음 신구간까지’가 되었다. 그게 딱 1년이다. 집세를 다달이 나눠 낼 이유가 없었다. 계약의 시작과 끝이 애초에 1년 단위로 딱 떨어졌으니까.
흥미로운 건, 이걸 누가 설계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관청이 “제주는 1년 단위로 계약합시다” 하고 정한 적이 없다. 신구간이라는 오래된 믿음이 이사 주기를 만들고, 그 주기가 계약 기간을 만들고, 그 기간이 집세 내는 방식까지 결정한 것이다. 연세는 만들어진 제도가 아니라, 뿌리에서 저절로 자라난 문화였다.
3. ‘죽어지는 세’라는 이름
제주 사람들이 연세를 부르는 다른 이름이 있다. 방언으로 ‘죽어지는 세’라고 한다.
한 번 목돈을 내고 나면 그 돈은 돌아오지 않고 ‘죽어’ 없어진다는 뜻이다. 전세처럼 돌려받는 돈이 아니라, 1년을 살고 나면 사라지는 돈. 이름 하나에 제주 사람들이 이 관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가 다 담겨 있다. 아깝지만, 그래도 그렇게 하기로 한 것이다.
왜 아까운 걸 알면서도 그렇게 했을까. 이 질문 앞에서 나는 잠깐 멈췄다.
4. 덜 계산하기 위해, 한 번에 계산하다
제주도의 분석에 따르면, 연세는 ‘섬이라는 좁은 공간’과 깊이 관련이 있다.
제주에서 집을 빌려주고 빌리는 상대는 대개 이웃이거나 먼 친척이었다. 좁은 섬 안에서 매일 얼굴을 마주치는 사이다. 그런 사람에게 다달이 “이번 달 집세요” 하고 손을 내미는 건, 여간 껄끄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제주 사람들은 아예 1년 치를 한 번에 정리해버렸다. 그러고 나면 남은 1년 동안은 돈 이야기를 꺼낼 일이 없다.
나는 이 대목에서 다시 멈췄다. 우리는 보통 계약이라고 하면 더 자주, 더 꼼꼼히 계산하는 쪽을 정확하고 안전하다고 여긴다. 그런데 제주 사람들은 정반대로 갔다. 덜 계산하기 위해, 딱 한 번에 계산해버린 것이다. 돈을 미리 죽여두는 이유가, 실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였던 셈이다. 집주인과 세입자를 돈 문제 앞에 매달 마주 세우는 대신, 이웃으로 남게 하려고.
5. 그래서 연세는 무엇인가
연세를 그저 ‘제주의 불편한 임대 관행’으로만 보면 놓치는 것이 있다.
연세 안에는 작은 선순환이 돌고 있었다. 돈 이야기를 미리 끝내두면 1년이 편안하고, 그 편안함이 이웃을 이웃으로 남게 한다. 그리고 다음 신구간이 오면, 사람들은 또 그 편안했던 집주인에게 짐을 푼다. 관계가 상하지 않았으니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미신에서 시작된 이사 풍속이, 결국은 사람 사이를 오래 잇는 방식으로 자라 있었다.
물론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목돈을 한 번에 내야 하니 세입자에게 부담이고, 표준계약서가 월세 기준이라 분쟁도 잦다. 제주도가 ‘제주형 임대차계약서’를 따로 만들 정도다. 연세는 이제 편리한 제도라기보다, 지켜야 할지 고민되는 관습에 가까워졌다.
하지만 이름 하나는 남았다. ‘죽어지는 세.’
돈을 미리 죽여두고, 대신 1년을 마음 편히 사는 것. 다달이 셈하지 않기로 하는 것. 어쩌면 제주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관계는, 셈을 자주 하지 않을수록 오래간다는 걸.
당신은 무엇을, 한 번에 정리해두고 살고 있나요.
본질을 탐구하고, 그것을 재해석합니다. 제주랩스.
참고 자료
- 김대영, 「제주에만 있는 ‘죽어지는 세’」, 제주일보 (jejunews.com, idxno=2218226) — 신구간과 연세의 연관, ‘죽어지는 세’ 명칭 및 신구간 세계관
- 좌동철, 「제주의 연세(年貰) 임대계약에 분쟁 ‘속출’」, 제주일보 (idxno=2137319) — 섬 공동체·껄끄러움 분석, 제주형 임대차계약서 도입
- 「제주도 1년 살기…80%가 월세」, 한국경제 (2025.4.29) — 연세의 통계상 위치와 현대적 실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