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캔 음료를 딸 때 손끝에 걸리는 작은 금속 고리가 있어요. 이 고리, 뭐라고 부르는지 아세요?
영어로는 ‘탭(tab)‘이라고 불러요. 우리말로는 ‘캔 고리’, ‘캔 따개’ 정도로 뭉뚱그려 부르고요. 하루에도 몇 번씩 손끝으로 당기는 물건인데, 막상 그 이름을 불러본 기억은 거의 없을 거예요.

이유는 단순해요. 캔이 열리는 순간, 이 고리가 할 일은 끝나거든요. 그다음엔 캔과 함께 버려져요. 할 일이 끝난 물건은 더 이상 불릴 일이 없어요. 이름이 없는 게 아니라, 아무도 부르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이 고리를 다시 불러낸 사람들이 있어요. 수백 개를 엮어 팔찌와 가방을 만드는 사람, 귀걸이 재료로 쓰는 사람들이요. 캔과 함께 버려지던 금속 조각이, 어떤 손에서는 액세서리가 돼요.

제주랩스가 하려는 일도 여기서 시작해요. 제주에서 불리지 않은 채 버려지는 것들에게, 새로운 쓰임을 찾아주는 일이죠.
폐기물과 원료 사이
감귤을 짜고 남은 껍질과 과육 더미가 있어요. 이름은 ‘감귤박(柑橘粕)‘이에요. 주스를 짜고 남은 것을 가리키는 말이죠. 제주에서는 이 감귤박이 매년 5만 톤 안팎으로 나와요. 처리하는 데만 한 해 12억 원 정도가 든다고 해요.
카페에서 커피를 내리고 남은 ‘커피박’, 인쇄소에서 잘려 나간 ‘파지’도 사정이 비슷해요. 모두 사전에 올라 있는 이름이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는 일은 드물어요. 대개는 ‘남은 것’, ‘찌꺼기’, ‘쓰레기’로 뭉뚱그려지고, 그저 폐기물로 처리되며 사라져 왔어요.
그런데 같은 것들이 다른 곳에서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해요. 감귤박은 화장품 원료가 되고, 파지는 누군가의 손에서 새 물건으로 태어나요. 한쪽에서 돈을 들여 버리는 것을, 다른 쪽에서는 돈을 주고 구하는 거예요.
제주랩스도 그 ‘다른 쪽’에서 시작했어요. 감귤박을 원료로 본 것이 제주랩스 화장품의 출발이었으니까요.

제주랩스 매거진에서 만난 파지앤양양의 김봄이 대표도 그래요. 누군가에게는 버릴 종이였던 파지가, 김봄이 대표에게는 파지 그림책과 메모지, 그리고 노트의 재료가 됐어요.

같은 물건인데, 한쪽에선 폐기물이고 한쪽에선 원료예요. 무엇이 둘을 갈랐을까요. 가치의 유무가 아니었어요. 만남의 유무였어요.
그래서, 도감을 만들었어요
만남이 우연에만 기대지 않도록, 제주랩스는 제주에서 버려지는 것들을 하나씩 찾아 이름을 불러주고 기록하기로 했어요. 이름하여 ‘제주 새활용 도감’이에요.
도감이라는 말을 고른 데는 이유가 있어요. 식물도감, 곤충도감처럼, 도감은 존재를 인정받은 것들의 목록이에요. 무언가가 도감에 오른다는 건, 이름으로 불리고 기록될 만한 존재로 대접받는다는 뜻이죠.
그래서 버려지던 것들을 도감의 표제어로 올렸어요. ‘폐기물 목록’이 아니라 ‘도감’이라고 부르는 순간, 뭉그러진 껍질 더미는 비로소 ‘감귤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해요.

도감을 쓰는 방법은 간단해요. 버려지는 것을 가진 사람은 ‘있어요’에, 그것이 필요한 사람은 ‘구해요’에 적어두면 돼요. 감귤박을 처리할 곳을 찾던 착즙 공장과, 새 원료를 찾던 작은 브랜드가 같은 페이지에서 서로를 발견하는 거예요.

새활용은 물건보다, 물건을 보는 눈에서 먼저 시작된다고 생각해요.
남은 것들은 어디로 갈까
이 일을 하며 알게 된 게 있어요. 무언가가 ‘남았다’는 말은, 끝났다는 뜻이 아니라는 걸요. 아직 쓰임을 만나지 못했다는 뜻에 더 가까웠어요.
이름으로 불리고, 기록되고, 필요한 사람과 이어지는 순간, 남은 것은 더 이상 남은 것이 아니게 돼요. 무언가의 시작이 되죠. 제주랩스가 ‘남은 것들로 남을 가치를’이라는 말을 붙들고 있는 것도 그래서예요.
제주에서 버려지는 것들 가운데, 정말 버려질 수밖에 없던 건 얼마나 될까요.
오늘 무심코 당긴 캔 고리처럼, 곁에도 불리지 않은 채 버려지는 것이 있을지 몰라요. 아깝다고 느낀 무언가가 있다면, 그 이름을 새활용 도감에 적어주세요. 당신의 ‘있어요’가 누군가의 ‘구해요’와 만날 수 있도록.
📌 도감 바로가기: https://www.jeju-upcycle-dogam.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