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윤찰나
창업가의 하루는 늘 예측할 수 없는 파도의 연속이죠. 매일 새로운 변수가 밀려오고, 정해진 루틴 없이 눈앞의 일들을 쳐내야 하니까요. 당장 저만해도 매거진 편집 도중 화장품 주문이 들어오면 누구보다 빠르게 사무실로 뛰어가 화장품을 포장하죠. 오늘 만나볼 김보미 대표님의 일상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해요. 제주 세화리에서 비누 브랜드 ‘녹다(Nokda)’를 운영하시며 변수 위 서핑을 하고 계십니다.
이 요동치는 시간 속에서도 그녀가 반드시 지키는 일과가 있어요. 매일 아침 아이를 등교시키며 바다를 눈에 담는 일이에요. 만조인지 간조인지, 바람은 어디로 부는지. 제주의 자연을 응시하는 이 시간은 풍경 감상을 넘어, 휩쓸리듯 흘러가는 일상 속에 잠시 멈춰 서서 스스로의 중심을 잡는 정리의 시간이죠.
복잡한 생각들을 씻어내고 온전한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 이런 태도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일로 이어져요. 그녀가 숱한 아이템 중 하필 ‘비누’를 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거든요. 비누는 묵묵히 제 몫을 다할 뿐, 끝내 아무런 껍데기(쓰레기)나 흔적을 남기지 않고 말끔히 사라지잖아요. 대표님은 남김없이 닳아 없어지는 그 속성에서 어떤 ‘숭고함’을 보았죠.
누군가 부여한 수식어나 소속에 기대기보다, 오롯이 자신의 힘을 믿고 나다운 삶을 꾸려가고 싶었던 사람. 흔적 없이 녹아내리는 비누를 통해 자신의 삶을 단단하게 빚어가는 김보미 대표님의 이야기. 지금부터 시작해 볼게요.
Part.1 명함을 떼어낸 자리, 비로소 마주한 나의 삶
20대 시절, 그녀는 서울에서 주로 스타트업을 거치며 교육 기획자로 일했어요. 페스티벌을 기획하고 클래스를 운영하며 팀이 함께 만들어내는 성취감은 그녀를 뿌듯하게 했죠. 하지만 스타트업의 특성상 조직의 폭발적인 성장과 갑작스러운 하락세를 모두 몸소 겪어야 했습니다.
잘 나가던 회사가 하루아침에 어려워지고 급여가 밀리는 최악의 상황까지 곁에서 지켜보면서, 마음 한편에 서늘한 질문 하나가 맴돌기 시작했다고 해요.
“조직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면, 나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뭘까?”

회사 명함을 떼고 나면 온전한 내 밥벌이를 하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직급이나 소속이 아닌, ‘나’로서 할 수 있는 일이 필요했죠. 그래서 직장 생활 틈틈이 주말마다 클래스를 찾아다니며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시도해 보기 시작했어요. 꽃꽂이도 해보고 베이킹도 배워봤죠. 그 수많은 취미 중 하나가 훗날 업이 된 ‘비누 만들기’였습니다.
내 일을 시작하고 싶다는 갈망은 점점 커졌지만, 당장 회사를 박차고 나오기엔 현실의 벽이 꽤 높았습니다. 넉넉지 않은 자본, 뛰어난 사람들 사이에서 느끼는 위축감, 그리고 여성으로서 마주할 커리어 단절에 대한 불안이 늘 발목을 잡았거든요.
Part.2 7년의 기다림, 제주가 가르쳐준 삶의 방정식
그 막연한 갈망의 물꼬를 터준 건 가족과 함께 떠났던 ‘제주 여행’이었습니다.
여행으로 제주를 오가며 이 섬이 가진 자연과 여유로움에 흠뻑 빠져들었고, ‘이런 환경에서 아이를 키우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시작이었죠. 무조건적인 경쟁 속에서 숨 가쁘게 살아가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라는 부부의 깊은 공감대가 형성됐어요.
“우리, 제주로 가볼까?”
그 결심과 함께 남편은 제주 발령을 신청했고, 장장 7년이라는 기다림 끝에 마침내 섬으로 건너올 수 있었어요.
도착한 제주는 그녀에게 서울에서는 상상도 못 했던 전혀 다른 삶의 방정식을 보여주었어요. 유동 인구나 상권을 치밀하게 분석하는 대신, 그저 ‘바다가 좋아서’, ‘산이 좋아서’라는 이유 하나로 낯선 마을 구석에 기꺼이 자신의 공간을 여는 사람들.
철저한 시장 논리보다 자신의 ‘믿음’을 나침반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그녀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망설임이 끝난 자리, 오랫동안 꾹꾹 눌러왔던 ‘나만의 일’에 대한 갈망이 마침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죠.
Part.3 남김없이 닳아 없어지는 것의 숭고함, ‘녹다’
오랜 갈망 끝에 대표님이 온전한 자신의 일로 꺼내든 건 ‘비누’였어요. 직장 생활 틈틈이 푹 빠져 지냈던 여러 취미 중 하나를 마침내 업으로 삼기로 한 거죠.
세상엔 이미 예쁘고 향 좋은 비누가 차고 넘쳐요. 하지만 그녀가 비누에 매료된 진짜 이유는 화려한 겉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비누 고유의 ‘물성’ 그 자체였죠.

“클렌징폼이나 바디워시는 아무리 털어 써도 결국 플라스틱 껍데기를 남기잖아요. 그런데 비누는 매일 쓰다 보면 조금씩 작아지고, 끝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말끔히 사라져요. 자기 역할을 다 해내고 조용히 사라지는 그 깔끔함이 저에겐 어떤 숭고함으로까지 느껴지더라고요.”
자신의 형태를 잃고 녹아내림으로써 본질적인 쓰임을 다하는 비누. 브랜드 이름 ‘녹다(Nokda)’는 이 속성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 결과물입니다.
첫 제품의 모양은 제주의 바닷가에 흔히 뒹구는 해양 쓰레기, ‘부이’에서 착안했어요. 바다를 걷다 보면 무서울 정도로 부이 쓰레기가 많거든요. 그녀는 이렇게 많은 부이가 버려져 있다는 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 마침 부이 특유의 둥글고 입체적인 형태는 비누로 만들었을 때 손에 쥐는 그립감과 사용감도 무척 훌륭했죠. 해양 쓰레기 문제라는 메시지와 비누로서의 기능적 장점, 두 가지를 모두 만족시키는 아주 좋은 디자인이었습니다.
Part.4 랩실에서 소통의 공간으로
시작은 소박했어요. 거창한 쇼룸보다는 그저 마음껏 비누를 만들어볼 ‘작업실’이 필요했죠. 그래서 유동 인구가 많은 1층 상가를 고집하는 대신, 동네에 오래 비어있던 낡은 2층 식당 자리를 계약해 랩실(Lab)처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생겼어요. 불이 켜진 2층 작업실로 사람들이 호기심에 한두 명씩 찾아오기 시작한 거예요. 굳이 그 좁은 계단을 걸어 올라와 준 분들을 그냥 돌려보내는 게 미안해서, 볼거리도 제공하고 제품도 판매해 보자는 결심을 하게 됐죠. 그래서 텅 비어있던 하얀 벽에 비누와 부이에 얽힌 이야기를 더해 큐레이션 형식의 공간을 하나씩 꾸려나갔습니다.

하얀 벽에 적힌 글을 찬찬히 읽고, 놓인 부이를 직접 만져보고, 마침내 비누로 손을 씻어보는 동선. 어느 날 매장 점검을 위해 CCTV를 열어본 그는, 한 손님이 자신이 기획한 흐름 그대로 공간을 진지하게 구경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뿌듯하고 행복했어요. 비록 소수일지라도 내 기획이 틀리지 않았구나, 사람들에게 오롯이 가닿았구나 하고 확인받는 순간이었으니까요.”

Part.5 속도에 치여 길을 잃을 것 같을 때
이처럼 소박한 랩실에서 기획한 이야기들이 누군가에게 가닿는 기쁨으로 내실을 다져가고 있지만, 주류와 다른 속도로 걷는다는 건 때론 외롭고 불안한 일이죠. ‘내가 지금 맞는 길을 가고 있나?’, ‘너무 뒤처지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쪽을 택했어요. ‘누군가의 아내, 아이의 엄마’라는 꼬리표를 다 떼어내고 남은 온전한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지, 지금 내 마음의 방향은 건강한지 집요하게 파고들죠.
물론 매일같이 나를 들여다보는 과정이 때로는 스스로를 지치게 만들기도 합니다. 스스로 납득할 만한 ‘나의 정의’를 내리지 못하면 짙은 슬럼프에 빠지기도 하거든요.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지거나 속도에 치여 길을 잃을 것 같을 때면, 그녀는 제주의 깊은 자연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사람이 없는 고요한 오름이나 수풀이 빽빽한 곶자왈을 향해서요.

“사람에게 압도당하면 자꾸 나보다 잘난 사람과 비교하게 되고 위축되잖아요. 그런데 대자연에 압도당하면 그저 말할 수 없는 큰 위로를 받아요. 쉬지 않고 치는 파도나, 척박한 돌무더기에서도 기어코 뿌리를 내리고 숲을 이루는 곶자왈의 나무들을 보고 있으면 제 안의 무거운 짐들이 싹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에요.”
치열한 도심의 경쟁에서 한 발짝 비켜서서, 생명력 짙은 제주의 땅에 발을 디디고 섰다는 감각. 매일 요동치는 일상 속에서 그녀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흔들림 없이 나아가게 하는 가장 강력한 중심이 되기도 합니다.
Part.6 내 손으로 지어 올릴 세계
10년 후의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표님은 뜻밖에도 ‘내 집 짓기’를 꼽았어요. 비누 브랜드 대표의 입에서 나온 대답 치고는 생소했지만, 그 이유를 듣다 보니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그 꿈은 그녀가 제주에서 새로 쓴 삶의 방식과 닿아 있었거든요.
“우리는 참 견고한 시스템 안에서 자라잖아요.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는 삶이요. 저도 그 트랙만 잘 따라가면 당연히 행복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처럼 늘 공허했어요.”
그 견고한 궤도를 처음 벗어난 선택이 바로 제주행이었어요. 인생의 갈림길에서 세상의 정답을 찾는 대신, 내 마음이 향하는 곳을 조용히 들여다보기 시작한 거죠. 나이를 먹고 부모가 된다고 저절로 어른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기꺼이 책임질 때 비로소 진짜 어른이 된다는 걸, 대표님은 제주에서 몸소 배운 셈이에요.
그렇게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만들어간 제주의 일상과 ‘녹다’가 지금 그녀에겐 가장 큰 행복이라고 해요. 10년 뒤 집을 짓겠다는 꿈도 결국 이 주체적인 삶과 같은 결을 가지고 있죠.
“내가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건 참 멋진 일이에요. 10년 뒤에는 우리 가족의 취향이 온전히 담긴 집을 제 손으로 짓고 싶어요. 거대한 시스템에 기대지 않고 내 손으로 나와 가족의 의식주를 해결한다는 건, 결국 삶 자체를 온전히 책임진다는 뜻이니까요. 그게 진정한 자립이자 자유 아닐까요?”
시간이 흘러 사람들에게 어떤 공간으로 기억되길 바라는지 묻자, 그녀는 기분 좋은 미소와 함께 답했어요.
“세상에 예쁜 비누는 이미 너무 많아요. 저는 그저 비누를 통해서 이런 삶의 이야기도 나눌 수 있구나, 참 재미있는 실험을 하는 공간도 있구나 하고 기억되고 싶어요.”
에디터 윤찰나

우리는 늘 무언가를 더하고 쌓아 올리는 데 익숙하죠. 이력서의 번듯한 한 줄, 더 넓은 공간, 혹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화려한 수식어들.
하지만 김보미 대표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약간은 다른 방향을 가리켜요. 남김없이 닳아 없어지는, 제 역할을 다하고 말끔하게 녹아내리는 비누처럼, 외부의 시선이나 소속에 의지하지 않고 오롯이 내 힘으로 서고자 하는 단단한 삶의 태도 말입니다.
우리도 말이죠. 바쁘게 쌓아 올리고 있는 것들을 잠시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불필요한 장식과 거추장스러운 수식어를 모두 덜어냈을 때, 우리에게는 과연 어떤 ‘본질’이 남게 될까요?
어쩌면 가장 나다운 삶은 더 많이 쌓아 올릴 때가 아니라, 덜어내고 비워낼 때 비로소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대표님은 세화리의 2층 랩실에서 비누를 빚습니다. 쓰레기를 남기지 않고 조용히 사라지는 비누처럼, 거창한 수식어 없이도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삶을 지어 올리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