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윤찰나

육중한 윤전기가 돌아가는 소리, 공기를 가득 채운 묵직한 잉크 냄새. 제주에 위치한 이 인쇄소 한편에는 매주 1톤 트럭 분량의 자투리 종이, 이른바 ‘파지(破紙)‘가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쓸모를 다해 폐기장으로 향해야 할 이 종이 무덤 앞에서, 조용히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굽히는 사람이 있어요.

프랑스 유학파 출신의 공연 예술 기획자이자, 현재는 버려지는 종이에 새로운 서사를 부여하는 업사이클링 브랜드 ‘파지앤양양’을 이끌고 있는 김봄이 대표님입니다.

그녀에게 버려진 종이란 단순히 쓸모를 잃은 폐기물이 아니었습니다. 영감을 실현할 새로운 창작의 캔버스였죠. 매일 똑같이 돌아가는 기계의 톱니바퀴 속에서도 스스로 ‘기계가 되지 않기 위해’ 걷고 사유한다는 그녀. 낭만적인 예술가가 버려진 종이에 관심을 갖기까지의 이야기이자, 쓸모를 다한 종이 속에서 소중한 알맹이를 빚어내는 그녀의 이야기를 시작해보고자 합니다.

Part.1 거리의 불꽃, 인쇄소에 둥지를 틀다

“정해진 시간도, 무대도 없어요. 길을 걷던 행인이 관객이 되고, 그 순간 우리가 서 있는 거리는 아름다운 공연장이 되죠.”

문화예술 경영을 전공하고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그녀의 본업은 거리를 캔버스 삼는 거리 예술 기획자였습니다. 고향 제주로 돌아와 불과 연극을 결합한 예술 단체 ‘살거스(Salgoce)‘를 꾸렸죠. 정해진 무대 없이 길을 걷던 행인이 관객이 되는 그 자유로움을, ‘무정형’의 예술을 참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가정을 꾸리고 아이가 태어나면서 현실적인 난관이 찾아왔습니다. 경제적인 한계는 때로 창작의 순수한 즐거움을 흔들기도 했죠. 생계와 예술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야 하는 순간이 온 것입니다.

결국 그녀는 외가에서 운영하던 인쇄소의 직원이 되기로 결심합니다. 거리를 누비며 영감을 불태우던 예술가가 매일 같은 공정으로 돌아가는 기계 앞에 서게 된, 삶을 지키기 위한 아주 정직한 선택이었습니다.

Part.2 버려지는 자투리, 영감을 담아내는 캔버스가 되다.

인쇄소의 톱니바퀴 같은 일상은 매일이 반복이었습니다. 창작을 하던 사람에게는 자칫 건조하고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는 공간이었죠. 하지만 진정한 예술가는 척박한 땅에서도 기어이 본질을 끄집어냅니다.

“그 안에서 제가 숨 쉴 수 있는 재미를, 일상의 온기를 어떻게든 찾아야만 했어요.”

그때 그녀의 시선이 머문 곳이 바로 매일 폐기장으로 향하는 자투리 종이들이었습니다. 아주 미세한 오타가 나거나, 제주의 변덕스러운 습기를 머금어 눅눅해졌다는 이유로 버려지는 파지들이었죠.

“1톤 트럭에 버려지는 종이들이 나갈 때마다 진짜 아깝다 저걸로 뭐 만들 수 없을까 맨날 그런 고민을 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파지들을 좀 모아놨어요. 언젠가 쓸 수 있겠지 그러면서.”

하지만 대표적인 사양 산업이자 오랜 관성이 지배하는 인쇄소에서 새로운 가치를 제안하는 일은 또 다른 현실의 벽이었습니다. 수십 년간 인쇄소를 지켜온 베테랑 기장님들과 직원분들은 옛날 인쇄 문화에 깊이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뭔가 다른 시도를 해보고 싶어서 아이디어를 제안하면 다들 귀찮아하셨어요. 심지어 버려지는 파지를 모으면서 ‘이거 제가 쓸게요’라고 말씀드려도, ‘그거 가져다 뭐 하려고 그러냐’면서 핀잔을 주기 일쑤였죠.””결국 제가 선택한 방법은 끊임없는 설득이었어요. 제가 만든 결과물들을 직접 들고 가서 ‘저 이런 거 해요, 이렇게 쓰여요’ 하고 계속 보여드렸죠. 어떻게 보면 조금 지치는 과정일 수도 있었는데, 막상 또 지나고 보니까 그렇게 아주 어려운 일만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웃음)”

그 완강한 공기를 바꾸기 위해 그녀는 커피 찌꺼기, 사탕수수, 감귤 껍질로 만든 새로운 재생지들을 인쇄소로 끊임없이 들고 가며 실험을 이어갔습니다.

매일 묵묵하게 건넨 설득은 결국 차가운 인쇄소에 온기를 불어넣었습니다. 처음에는 귀찮아하셨던 기장님들께서, 어느새 쓸만한 파지들을 대표님께 건네기 시작한 것이죠. 무미건조했던 생계의 터전이 어느새 그녀만의 가장 실험적이고 다정한 창작의 공간으로 변모해 간 것입니다.

PART.3 방황으로부터의 선물: 균형

두 아이의 엄마, 인쇄소 직원, 업사이클링 브랜드 ‘파지앤양양’의 대표,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거리로 나가 ‘살거스(Salgoce)‘의 공연을 기획하는 기획자. 수많은 역할이 쉴 새 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와중에도 그녀는 신기할 정도로 평온한 에너지를 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단단함은 결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 역시 깊은 방황의 시간을 겪어야 했죠.

“사실 지난 3~4년은 흔들림이 많았던 시간이었어요. 특히 둘째 딸이 태어나면서 경제적인 부분을 무시할 수가 없었죠. 예전엔 그저 제가 하고 싶은 창작만 하며 살았다면, 아이들이 삶의 중심이 되면서 현실과 타협하는 점이 아무래도 더 많이 생겼어요. 경제적인 부분을 생각해 억지로 원치 않는 공연이나 프로젝트를 맡아야 했던 적도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녀는 그 타협의 순간을 비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삶을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본질적이면서도 긍정적인 계기로 삼았죠. 억지로 해야 했던 공연들은 과감히 내려놓고, 진짜 하고 싶은 프로젝트만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대신 ‘파지앤양양’과 인쇄소의 일상 속에서 창작에 대한 갈증을 채우며 더 건강한 균형을 찾아가기로 했죠.

PART.4 “나는 기계가 아니야”, 사유(思惟)라는 이름의 안식처

이 치열한 균형 잡기의 과정에서 그녀를 다 잡아준 것은 다름 아닌 사유와 창작이었습니다. 쉴 새 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수많은 역할의 톱니바퀴들 속에서,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한 그녀만의 고요한 안식처였죠.

“창작은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게 아니에요. 끊임없이 생각하는 일, 그 사유의 과정 자체죠. 인쇄소에서 매일 반복되는 일을 하다 보면 문득 제가 기계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하지만 무언가를 깊이 고민하고 만들어내는 희열을 느낄 때 비로소 확인하죠. ‘아, 나는 살아 숨 쉬고 있구나.’”

그녀는 요즘도 틈이 날 때마다 자동차 키를 내려놓고 홀로 걷기를 청합니다. 이 묵묵한 사유의 곁을 든든하게 내어주는 것은 제주의 자연이고요. 제주의 바람을 맞고, 계절마다 변하는 제주의 숲과 바다를 온몸으로 느끼며 비운 머릿속을 자연의 영감으로 채워 넣습니다.

“아무리 일상이 바쁘고 정신없어도, 제 스스로를 잃지 않으려고 엄청 노력해요. 저 혼자 사유하고 창작하는 시간만큼은 어떻게든 사수하려고 하죠.”

그리고 그 단단해진 마음의 중심에는 언제나 ‘가족’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삶의 중심이 되면서 현실과 타협해야 했던 순간들도 있었지만, 결국 그녀가 본질을 사유하며 치열하게 창작을 이어가는 이유는 그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더 건강하고 행복한 일상을 살아가기 위함이니까요.

PART.5 흩어진 점들은 결국 하나의 선으로 연결된다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긴 시간 균형을 맞춰오며 몸소 찾아낸 귀중한 교훈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지요. 그녀는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라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창의성이란 결국 연결이며, 하기 싫은 일을 버텨내야 했던 시간조차 기꺼이 경험하려 노력하다 보면 결국 다른 것과 만나 탁 터지는 순간이 온다는 것이죠. 어쩔 수 없이 버텨내야 했던 고단한 시간도, 포기하지 않고 걷다 보니 결국 ‘파지앤양양’이라는 온전한 가치로 경이롭게 연결된 것입니다.

“정말 경험이 중요한 것 같아요. 뭐든지 하려고 하는 의욕도요. 제 딸이 고3이기도 하고, 저도 어려운 시기를 지내면서 느꼈어요. 정말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해야 되는 상황에서 비관적으로 뭔가를 하기보다는 열정적으로 찾으며 하다 보면, 그 모든 것들이 다 연결이 되더라고요. 어느 순간 그게 다 모여서 임팩트 있게 탁 터져 맞아요. 다음에 일어날 일들이 기대되기도 하고요. 이건 또 어떻게 연결이 될지.”

PART.6 꿈에 대하여

다음에 일어날 일들이 벌써부터 기대된다는 그녀에게, 앞으로 마주하고 싶은 미래의 모습을 물었습니다. 돌아온 대답에는 오랜 세월 인쇄소와 거리를 지키며 쌓아온 단단한 고민과 다정한 야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단기적인 꿈은 내년 즈음 ‘파지앤양양’의 오프라인 매장을 내는 거예요. 제가 인쇄소에서 일한 지도 어느덧 10년이 넘었거든요. 가만히 보니 일반 고객분들이 종이에 대한 궁금증이 참 많으신데, 막상 일상에서 다양한 종이를 접할 기회가 별로 없더라고요.

그래서 매장을 열게 된다면 파지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다채로운 종이들을 직접 만져보고, 버려지던 것들이 새로운 이야기로 포장되어 상품이 되었을 때의 가치를 온전히 느끼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요즘은 ‘그 공간을 어떤 체험들로 채워볼까’ 행복한 상상을 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공간이라는 단기적인 목표 너머, 그녀가 바라보는 가장 이상적인 꿈은 무엇일까요. 그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예술인들을 위한 든든한 후원자’가 되는 것이라 말합니다.

“제가 진짜 돈을 많이 벌고 여유로워지면, 창작하시는 젊은 예술인 분들을 꼭 도와주고 싶어요. 저 역시 10년 넘게 공공 지원 사업의 사이클 안에서 창작을 해오다 보니 그 생태계가 가진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거든요.”

”우리나라는 특히나 문화예술 분야에 기업이나 개인의 후원이 많이 부족해요. 대부분 공공 기금에 기대어 위태롭게 창작이 이루어지죠. 그래서 저부터 빨리 성공하고 싶어요. 성공한 기업인이 예술가를 멋지게 후원하는 문화를 만드는 것. 제주도에서 치열하게 자신만의 궤적을 깎아가는 예술인 분들을 위한 제 오래된 꿈입니다.”

에디터 윤찰나

인터뷰를 마치고 인쇄소를 나서는 길, 어쩌면 우리 일상 속 가장 빛나는 영감은 무심코 스쳐 지나갔던, 작디작은 자투리 시간과 경험 속에 숨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버려지던 파지가 누군가의 마음에 닿는 단단한 노트로 거듭났듯, 섬에서 각자의 궤적을 깎아내며 버텨낸 우리의 하루도 결국 소외됨 없이 연결되어 가장 온전한 서사로 묶이길 기도합니다. 서로의 본질을 기꺼이 나누게 될 이 다정한 커뮤니티 속에서 말이죠.

당신은 오늘, 어떤 방식으로 스스로의 알맹이를, 자기 자신을, 혹은 소중한 꿈을 빚어내고 계신가요? 잠시 속도를 줄이고, 당신이 지나쳐 온 일상의 자투리 속에 숨겨진 빛나는 그 무언가를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요?